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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는 100대명산

[100대명산]영남학파가 사랑한 경북 봉화 청량산 전망대, 축융봉 유산기

by 일신우일신1 2020.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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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 이 름 : 청량산 축융봉 (100대 명산)

2. 위 치 : 경상북도 봉화군

3. 높 이 : 845미터

4. 산행일시 : 2018. 12. 1.(토) 10:05 - 14:50 (4시간 45분, 순수산행시간 3시간)

5. 산행거리 : 7.9Km

6, 산행코스 : 청량산 입구(청량교) → 축융봉 → 산성길 → 밀성대 → 산성입구 → 입석 → 청량폭포 기점

7. 동행자 : 경인솔방울산악회 24명 

 

 

 

 

- 봉화읍에서 동남쪽으로 26km 떨어진 청량산(869.7m)에는 금탑봉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봉우리 12개와 8개의 동굴이 있다.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옛부터 소금강이라 전하여지는 명산으로써 태백산에서부터 시작되는 낙동강 줄기가 절벽을 감아돌아 절경을 빚어내고 있으며,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대와 선녀가 가무유희를 즐겼다는 선녀봉을 비롯하여 12봉의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신라때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김생, 퇴계이황등 선현들이 수도를 하던 유불선교 발상지로 널리 알려져 있을뿐만 아니라 고려 공민왕 10년에 제2차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왕이 이곳에 와 마지막요새로써 산성을 축조하였고, 난이 끝난후 왕이 이곳을 떠나자 주민들이 왕을 추모하기 위하여 공민왕당을 세우고 봄, 가을로 공을 드리자 대란이 있을때 마다 소리가 울려 재난을 피할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곳 공민왕당을 오르는 등산로는 말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지나다녔다는 五馬道가 있다.(산림청 자료 참조)

 

- 다시 찾은 청량산은 나에게 썩 좋은 기억을 남긴 곳은 아니다. 6년 전 무더위 염천에 아내와 함께 찾았지만 청량폭포에서 오르는 길이 땡볕에 노출되어 어찌나 등골이 뜨겁던지, 내내 욕(?)을 하며 걸었던 길이다.

아마도 여름산행에 적합한, 청량(淸凉)한 산일 것이라는 기대에 대한 배신감이 컸던 탓이었을까. 정상부 구름다리도 너무 인위적인 것 같고, 산세도 그냥저냥에, 짧고 가파르기만한 등산로까지.. 어쨌든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은 없던 곳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내 목적은 그저 축융봉을 올라보는 것이다. 어디 얼마나 그럴싸한 풍경인지 건너편에서 확인하려는 것이다.

 

- 사실 청량산은 신재 주세붕과 퇴계 이황이 전국구 스타로 띄운 산이다.

1544년(중종39) 풍기군수로 재직하던 주세붕은 일주일간 청량산을 유람한 뒤 <유청량산록>이라는 최초의 청량산 유산기를 남겼으니 이는 후일 청량산을 찾는 양반들이 참고해야 할 유산기의 전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게다가 청량산 열두 봉우리의 이름을 유교식으로 개명하여 청량산을 유학의 성지로 내세우는 의도적 스토리텔링을 부여한다.(청량산이라는 이름도 이때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닌지...)

 

어릴 적부터 청량산과 인연이 깊어 "청량산인"을 자처했던 퇴계 이황은 신재 주세붕을 이어 풍기군수까지 지냈거니와, 신재의 주장에 열렬한 호응으로 맞장구를 친다. 이황은 청량산과 신재의 만남을 "山의 일대 만남"이요, "청량산이 임자를 만나 그 진가를 비로소 얻었"으니 신재야말로 "위대하시다"고까지 극찬하였다.

 

이후 수백년간 안동 양반들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 후학들이 그들의 가이드(?)에 따라 일종의 성지순례처럼 청량산을 둘러보고 각자의 소감을 다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관례가 되었던 것이다.

 

- 이렇게 하여 기록으로 남은 청량산 유산기는 80여편이 된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유산기 전체가 560여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특별한 사례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유산기라고 하면 대부분 금강산에 대한 것이고 그 밖에 백두산, 지리산, 소백산, 가야산, 북한산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청량산이 지리산의 70편보다도 많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 2011년 100대명산을 시작한 이래 각각의 산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특징과 숨겨진 張三李四의 역사, 시공간의 변천사를 더듬어 보고 나름의 합리적 추론으로 상상하는 취미를 가진 후부터 조선시대의 등산 기록(유산기)들이 전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00대명산 완등 후기>에 적은 바와 같이 나는 “산을 다니기 전에 생각한 역사관이 주로 通時的, 巨視的, 抽象的, 세력과 흐름의 辨證法的 인식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전국 방방곡곡의 산을 다니게 된 후 변화된 관심은 共時的, 微視的, 具體的, 개인과 단편화된 삶의 서사에 미치게 된 것”이 사실이다.

 

-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보자면 청량산을 자신들만의 상징으로써 성지화하려 했던 영남학파 양반들의 시도에 비판적 거부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첫째, 아무래도 지나친 작위적 과장이다.
나 살던 고향 풍광좋은 산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 조금 과장된 묘사 정도는 적극적 애향심의 발로로써 칭찬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지방권세와 관련한 주관적 의도하에 일정한 정치적 목적까지 엿보이는 맹목적, 선동적 찬양으로 일관된 것은 아무래도 거슬린다.
주세붕 스스로 적은 바와 같이 “쓸쓸하게 천년 동안 김생과 고운(최치원) 두 사람에게 기대어 한 나라 안에서만 알려졌던” 동네산을 신재와 퇴계 두 사람이 세계적(?) 명산으로 둔갑시키려 한 것이다.

 

둘째, 결국 지역적, 당파적 “패거리 문화”로 연결될 수 있다.
청량산 유산에 참여한 사람 대부분이 안동 지역 양반들이었고 이들 모두가 이황을 따르는 남인 계열, 영남학파 후학들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유산 기록의 목적도 자연경관 탐방이나 수양이 아니라 퇴계 이황의 가르침을 따라 스승과 제자들의 대화와 학문 성취를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소수 집단문화가 300년이 넘도록 지속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왜란, 호란을 겪으며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진 17,8세기 조선 후기 사회의 지방 권세가들이 하인들을 부려가며 한가롭게 학문적 유람이나 즐겼다는 것도 마뜩찮게 여겨진다.
이황이 ‘우리 집안의 산’, 즉 오가산(吾家山)이라 칭하고 후대 사람들이 '오산당'을 짓거나 '오가산지'를 편찬한 것을 보면 청량산이 그들 집단의 상징적 독점 공간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셋째, 편협한 자가당착적 사고를 보여 주기도 한다.
청량산을 순례한 후학들이 신재와 퇴계를 맹목적으로 따르며 고담준론을 읊었을 뿐 딱히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거나 자아성찰, 인격수양 등 사고의 지평을 넓힌 것도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현재 입석 등산로 입구 커다란 돌에 새겨진 권성구의 글을 보자.

 

聞說金剛勝(문설금강승) 금강산 좋다는 말 듣기는 해도
此生遊未嘗(차생유미상) 여태껏 살면서도 가지 못했네
淸凉卽其亞(청량즉기아) 청량산은 금강산에 버금가니
好作小金剛(호작소금강) 자그마한 금강이라 이를만 하지

 

금강산을 간 적은 없지만 청량산은 금강산 다음이라...니, 이 무슨 황당무계한 논리적 비약이며 근거없는 갈라파고스적 인식 오류란 말인가. 小金剛 타령이야 전국 어느 산을 가더라도 자주 보게 되는 옛 시골뜨기(?)들의 오버일뿐이지만 청량산을 유람한 양반님들 대부분은 실제 이렇게 믿은 듯 하여 단순한 농이나 애교로 넘길 수준을 넘어섰다.
무릇 학문하는 자라면 스스로를 돌아보며 진리 탐구의 지경을 넓히기 위한 경계와 겸양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실제 권성구가 쓴 1706년의 ‘유청량산록’을 보면 이름난 먼 산을 다녀보지 못한 스스로를 우물안 개구리와 같이 견문 없음을 한탄하고 있으며 위 글도 동행한 이들과 즉석에서 주고받은 오언절구중 하나일 뿐이니 앞뒤 자르고 미묘한 뉘앙스의 국역으로 버젓이 돌에 새긴 현재 그 누군가의 용렬함을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가벼운 산행기 하나 적으려다 잡설이 길어졌다. 가마 타고 다니며 돌아본 동네산을 정색하고 금강산, 지리산에 견주었던(대부분은 가 본 적도 없었던) 토착 향반들이 하도 얄미워 나 역시 반쯤 정색하고 썰을 풀어 본 것이다.

 

- 산행기와는 무관하지만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사실 나는 퇴계 이황에게 무슨 업적이 있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하여 늘 궁금하게 생각한다. 주리파 유교철학의 대가라거나 도산서원을 세웠다거나 하는 등등의 ‘업적’이 당시의 사회발전이나 후세의 치열한 역사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혹시 퇴계 이황이야말로 그를 따르는 후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 낸 허상은 아닌 것인지 의구심마저 드는 것이니..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퇴계 이황의 졸기(卒記)는 그가 “..... 빈약(貧約)을 편안하게 여기고 담박(淡泊)을 좋아했으며 이끗이나 형세,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황 스스로도 『성학십도』에서 "부동심(不動心)에 이르러야 부귀(富貴)가 마음을 음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貧賤)이 마음을 바꾸게 하지 못하여 도가 밝아지고 덕이 세워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수건 교수의 연구자료에 나타난 퇴계 이황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황이 죽고 불과 16년이 지난 1586년에 그의 유일한 상속자였던 아들 이준이 그 자녀를 위해 남긴 분재기(分財記)를 살펴보면 표리부동했던 한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당시의 사회구조로 보았을 때 양반의 재산은 노비(奴婢)와 전답(田畓)이 가장 중요했으니 이황 생전에 노비는 250-300명, 전답은 현재 기준 36만평 이상으로 당시 지방 지주들의 재산규모와 비교해도 월등히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황이 아들에게 보낸 수많은 서찰의 내용을 보면 그가 재산 증식을 위한 탐욕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노비들을 양인과 결혼시키도록 독려하므로써(良賤交婚) 부모중 한 명이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一賤卽賤) 악법을 이용하여 노비 숫자를 늘리려 애를 쓰는 등 우리가 알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 산행 들머리는 청량산 입구.

일행들과 헤어져 홀로 축융봉으로 향한다. ▼

 

 

 

▼ 산악회 일행들은 건너편 장인봉을 향해 오르고 있을 것이다. ▼

 

 

 

 

▼ 예상했던 것보다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 이어진다. ▼

 

 

 

 

 

 

 

 

▼ 1시간여 땀을 흘리고 나니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구름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

 

 

 

▼ 쉽게 생각했던 코스였는데 의외로 오르막이 계속된다. ▼

 

 

▼ 가끔 나타나는 계단들은 한 칸이 너무 높게 설치되어 다리에 힘을 줘야 한다.

숏다리 등산객들에게는 꽤나 버거운 구간이 될 것이다. ▼

 

 

 

 

▼ 드디어 축융봉이 나타났다.

생각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훨씬 많은 땀을 흘린 후에야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

 

 

 

▼ 축융봉으로 오르는 마지막 철계단.

오른쪽이 축융봉이다. ▼

 

 

▼ 캬~ 좋구나.

뿌연 날씨가 아쉽지만 축융봉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매우 만족스럽다. ▼

 

 

▼ 축융(祝融)이라면 중국 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이자 남쪽의 신이라 하니 청량산의 남쪽 봉우리를 의미하는가 보다. ▼

 

 

 ▼ 축융봉 정상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배낭을 열었다.

청량사와 응진전부터 당겨 보고. ▼

 

 

▼ 청량사 전경.

원래 계획은 축융봉을 내려간 후 저 곳 청량사까지 올라가서 하산하는 산악회 일행들과 합류하려던 것이었는데...

에라, 일단은 여기서 죽치고 혼자 놀아 볼 참이다. ▼

 

 

▼ 응진전도 최대한 당겨 본다. ▼

 

 

 

▼ 파노라마도 빠질 수 없지.

왼쪽에 낙동강 줄기, 오른쪽 산성 하산길 너머 멀리 일월산도 보인다.

온통 알바로 고생시켰던 일월산 여자 산신령도 안녕하시겠지? ▼

 

 

 

▼ 뭐 이렇게 보니 '이황의 산' 청량산이 근사하긴 하네.

그렇더라도 금강산, 지리산과 맞먹으려 했다는건 해도 너무 한 것 아니겠는가. ▼

 

 

 

▼ 장인봉과 구름다리도 당겨 보고. ▼

 

 

▼ 언듯 진안 마이산이 연상되기도 하는 그림이다. ▼

 

 

▼ 연적봉, 탁필봉, 자소봉의 모습.

다닥다닥 붙은 바위들까지 전부 각각의 봉우리로 이름붙였으니 부르기도 송구한 마음이다.

사진의 구도는 사실 그 밑의 절벽과 청량사를 겨냥한 것이다. ▼

 

 

▼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홀딱 맨몸을 드러낸 청량산의 우람한 근육들이 보기에도 시원하다.

그러나 자꾸 이황 일파의 평가에 생각이 미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누가 봐도 청량산이 명산중 하나임은 분명하겠으나 산세로 따지더라도 이에 못지않은 절경이 내가 다녀 본 남한에만 수백곳인데 북한까지 포함해야 하는 당시 조선이라면 영남학파의 맹목적 수사(修辭)들은 아무래도 산·알·못 들의 호들갑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

 

 

▼ 저 흐르는 물이 낙동강임을 이번에야 처음 알게 되었다. ▼

 

 

▼ 잠시후 가야 할 하산길. 보기에도 엄청 편안해 보인다.

저 멀리 일월산 정상부의 군부대 시설물도 충분히 분간할 수 있다. ▼

 

 

▼ 봉우리 설명도 친절하다.

여기서 보니 인공구조물인 하늘다리가 묘하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

 

 

 

▼ 막상 청량산을 직접 걸을 때는 이렇게 멋진 산인줄 미처 몰랐었다.

역시 한 발 떨어져서 객체화된 본모습을 바라 보는 시선이 긴요함을 절감한다.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모습에 사진을 100장도 넘게 찍으며 시간을 보낸다. ▼

 

 

▼ 무려 한 시간을 축융봉에서 보냈다.

예전부터 시간만 충분하다면 나는 전망좋은 산 꼭대기에서 한 시간 반씩 혼자 앉아 있곤 했다. ▼

 

 

▼ 산성길 걷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으니 슬슬 내려 가기로 한다. ▼

 

 

▼ 돌아 본 정상부는 3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가운데가 축융봉이다. ▼

 

 

▼ 올겨울 처음으로 눈길을 걸어 본다.

짧은 구간이지만 웬지 신나는 기분이다. ▼

 

 

 

 

▼ 뒤돌아 본 축융봉. ▼

 

 

 

 

 

 

 

▼ 보는 각도가 다르니 청량산의 근육질 몸매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단풍도 모두 떨어져 바야흐로 바위의 계절이 다가 왔으니 눈이라도 올라치면 또다른 별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

 

 

 

 

 

 

 

 

 

 

 

▼ 어느덧 청량사는 암벽 뒤로 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다. ▼

 

 

 

 

 

 

▼ 밀성대에 도착한다.

공민왕 시절 시원찮은 병사들을 성벽에서 밀어 버렸다고 밀성대라나?. ▼

 

 

▼ 밀성대에서 바라 본 청량산. ▼

 

 

 

▼ 밀성대와 축융봉. ▼

 

 

 

 

 

▼ 올려다 본 밀성대 절벽.

저 위에서 밀어 버렸다면 쉽게 죽지도 못했을 높이인 것 같다. ▼

 

 

 

 

▼ 계곡 옆 편안한 숲길을 걷다 보면, ▼

 

 

▼ 금새 도로가 나타난다. ▼

 

 

▼ 인적없는 입석 입구 정자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일행을 기다린다.

안내도 옆 큼지막한 돌에 내가 비웃은 권성구의 오언절구가 적혀 있다.

30여분을 기다린 후 일행과 합류하여 주차장으로 이동한다.

청량산박물관 옆 식당에서 여유로운 하산식을 즐기고 버스에 타자마자 편안한 잠에 빠져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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