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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경북 안동 봉정사

by 일신우일신1 2024.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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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등산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는 길에 봉정사를 둘러 보았다. 막연히 짐작했던 것보다는 작은 규모. 절집 그 자체보다 봄나들이에 나선 사람들의 밝은 모습이 더 기억에 남았다.

봉정사는? :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682년(신문왕 2) 의상(義湘)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왔으나, 1972년 극락전에서 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672년(문무왕 12) 능인(能仁) 대사가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천등굴에서 수학하던 능인 대사가 도력으로 종이로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 후 능인은 이 절에다 화엄강당(華嚴講堂)을 짓고 제자들에게 전법(傳法)하였다 한다.
또 일설에는 능인이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 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혔고, 청마(靑馬)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봉정사라 하였다고도 한다.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때는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절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志)』에, ‘부(府)의 서쪽 30 리에 천등산이 있다.’고 하였으며, 1566년(명종 21) 퇴계이황(李滉)이 시를 지어 절의 동쪽에 있는 낙수대(落水臺)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에서도 계속 존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조선시대 초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였고, 500여 결(結)의 논밭을 지녔으며, 당우도 전체 75칸이나 되었던 대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1999년 4월 21일에 봉정사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 절에는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봉정사 대웅전, 1967년 보물로 지정된 봉정사 화엄강당과 봉정사 고금당 등의 지정문화재와 무량해회(無量海會: 僧房)·만세루(萬歲樓)·우화루(雨花樓)·요사채 등 21동의 건물이 있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서 198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총 높이 3.35m의 봉정사 삼층석탑이 있고, 경판고(經板庫)에는 대장경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부속암자로는 퇴락한 영산암(靈山庵)과 오른쪽 골짜기 부근의 지조암(智照庵)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 참조)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공사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로 추정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배흘림 형태이며,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기둥위에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다.(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참조)

 

- 중심 법당인 대웅전에는 석가모니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1962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전기 건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친 재료의 꾸밈없는 모양이 고려말·조선초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고 앞쪽에 쪽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건물 안쪽에는 단청이 잘 남아 있어 이 시대 문양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건실하고 힘찬 짜임새를 잘 갖추고 있어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참조)

 

 

 

- 봉정사의 영산암은 지조암과 함께 봉정사의 부속암자로 응진전, 영화실, 송암당, 삼성각, 우화루·관심당 등 5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건물의 구체적인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봉정사영산암향로전창건기'와 '봉정사영산전중수기' 등의 사료로 볼 때 19세기 말로 추정된다.
건축적으로는 크게 주목할만한 부분은 없으나 우화루와 송암당 등에서 폐쇄적인 공간을 개방적으로 처리한 것이나 삼성각 앞의 조경수법도 경직될 수 있는 공간을 부드럽게 유도한 것 등은 매우 뛰어난 공간처리 수법으로 볼 만 하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참조)

 

 

- 만세루는 봉정사 대웅전 앞에 있는 2층의 누각형태를 한 누문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2층이나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뒷면은 단층으로 처리하였다. 아래층 가운데 칸에 출입문을 두었으며, 위층은 네모난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다.
봉정사의 입구에 해당하는 누문으로 원래는 덕휘루로 불리웠으나 언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숙종 6년(1680)에 건립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된 만세루는 17세기 후반의 건실하면서도 당당한 건축수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참조)

 

 

 

- 명옥대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의 사림에서 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강도(講道)하던 자리를 기념하여 지은 정자이다. 옛 이름은 낙수대(落水臺)였으나 육사형(陸士衡)의 「초은시(招隱詩)」에 나오는 ‘나는 샘이 명옥을 씻겨 내리네(飛泉漱鳴玉)’라는 구절을 따와 명옥대로 바꾸었다고 한다.

봉정사(鳳停寺) 어귀의 왼쪽 석간수가 흐르는 계곡의 건너편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명옥대 맞은편에 ‘명옥대(鳴玉臺)’라 새긴 바위가 남아 있다. 명옥대는 1655년(현종 6) 퇴계 이황이 학문을 가르치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명옥대는 자연석 초석 위에 원형 통재기둥을 세우고 누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평면에 계자 난간을 두르고 있으며 사면 모두를 개방하여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좋게 하였다. 기둥 위에는 주두와 보아지를 놓아서 보를 결구하였다. 종량의 한쪽 끝은 동자주(童子柱) 위에 보아지를 놓아 결구하였고 다른 쪽 끝은 대접받침 위에 보아지를 놓아서 결구하였으며, 그 위에 제형 판대공을 세우고 첨차(檐遮)를 직교시켜 마루대와 장혀를 얹었다. 기둥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서 뒤쪽 2칸은 원래 방이었던 것을 뒤에 지금과 같이 모두 개방된 누마루 형식으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디지털안동문화대전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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